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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E.K. Hunt 경제사상사

by Beer_Pepperoni 2026. 5. 23.

E.K. Hunt 경제사상사를 읽고

두껍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펼쳤을 때 좀 겁먹었다. 경제사상사라는 주제 자체가 어렵기도 하고, 번역본 기준으로도 1,000페이지가 훌쩍 넘으니까. 그래도 고전파부터 마르크스까지 한 권으로 정리해보고 싶어서 끝까지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흥미로운 책이다. 근데 좀 불편하다.


잘 쓴 책이긴 하다

일단 Hunt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는 건 페이지마다 느껴진다. 스콜라 철학부터 시작해서 중상주의, 중농주의, 고전파, 공리주의, 마르크스, 신고전파까지 이 흐름을 단순히 사상의 목록으로 나열하는 게 아니라, 각각의 이론이 어떤 시대적 문제에 대한 응답으로 나왔는지를 짚어주는 방식이 좋았다. 

"경제 이론도 결국 사람이 만든 것이고, 그 사람이 살던 시대와 맥락을 반영한다"는 문제의식도 자체로는 맞는 말이다. 주류 경제학 교과서가 당연하게 깔고 가는 전제들을 한 번쯤 의심해보는 건 필요한 일이고, 그런 의미에서 Hunt의 질문들은 읽을 가치가 있다.

근데 문제는 질문이 아니라 답을 처리하는 방식에 있다.


처음부터 결론이 정해져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든 느낌은, Hunt가 이미 답을 정해놓고 역사를 그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답은 대략 이렇다. "자본주의는 착취의 체제고, 주류 경제학은 그걸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다."

이 틀이 워낙 단단하게 박혀 있다 보니, 이 틀에 맞지 않는 이론이 나오면 내용으로 반박하는 게 아니라 "그 이론이 왜 그때 나왔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처리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한계혁명이다. 1870년대에 멩거, 제번스, 왈라스가 각자 독립적으로 내놓은 한계효용 이론은, 가치의 원천이 노동 투입량이 아니라 주관적인 한계효용에 있다는 주장이다. 물 한 잔이 사막에서와 강가에서 다른 가치를 가지는 건 직관적으로도 납득이 간다. 이 이론이 노동가치론에 제기하는 도전은 꽤 강력하다.

Hunt의 대응은 뭔가. 이 이론이 왜 틀렸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자본가 계급이 착취를 폭로할 위험이 있는 고전파 정치경제학을 신고전파로 대체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이론의 내용이 아니라 이론의 등장 배경을 공격한다.

근데 이건 논리적으로 이상하다. 어떤 주장이 특정 집단에 유리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것과, 그 주장 자체가 틀렸다는 건 다른 얘기니까. 게다가 이 논리를 그대로 뒤집으면, 마르크스 경제학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해체할 수 있다. Hunt는 그 가능성을 한 번도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다.


애덤 스미스를 반만 읽었다

스미스 해석도 솔직히 석연치 않았다.

Hunt는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적 표현, 분업의 소외에 대한 우려, 지주 계급 비판을 모아서 스미스를 마르크스의 선구자처럼 만든다. 물론 그런 측면이 스미스에게 없지는 않다. 근데 국부론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게 이 책의 핵심이 아니라는 걸 안다.

스미스가 하려던 말의 중심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 각자가 자기 이익을 쫓는 과정에서 시장이 이것들을 조정해 전체적으로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것. 이건 착취와 계급 갈등 서사와는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

스미스가 분업의 문제를 지적했다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 지적이 국부론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Hunt의 서술은 나무 한 그루를 골라 숲 전체의 모양을 결론 내리는 것처럼 읽힌다. 스미스의 언어가 노동가치론적이었던 건 당시의 분석 도구가 그랬기 때문이지, 자본주의를 고발하는 선언이 아니었다.


시장이 하는 일에 대한 이해가 빠져 있다

이 책은 자본주의를 과잉생산, 경기순환, 독점, 착취의 체제로 묘사한다. 이런 문제들이 자본주의에 없다는 게 아니다. 근데 시장이 실제로 무슨 기능을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이 서술에는 빠져 있다.

하이에크가 지적한 게 이거다. 가격 시스템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수단이 아니라, 수백만 명이 흩어져 가지고 있는 정보를 집약하고 전달하는 메커니즘이다. 어디에 뭐가 필요한지, 자원이 어디 있는지, 기술이 어디까지 왔는지—이런 정보를 중앙에서 모아서 처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시장은 이걸 아무도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처리한다.

슘페터 얘기도 없다. 기업이 망하고, 산업이 바뀌고, 일자리가 생기고 없어지는 것—Hunt는 이걸 자본주의의 결함으로 보는데, 슘페터는 이게 혁신이 작동하는 방식이라고 봤다. 불안정성이 곧 병이 아닐 수 있다는 시각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강압 없이 양쪽이 합의해서 이루어진 거래에서 착취가 어떻게 성립하는지 잘 모르겠다. 두 사람이 자발적으로 교환할 때 각자는 상대방이 주는 것이 자기가 내놓는 것보다 더 가치 있다고 판단하니까 거래를 한다. 여기서 착취를 끌어내려면 노동가치론이 먼저 성립해야 한다. 근데 그 전제 자체가 논쟁 중인데, Hunt는 그걸 당연한 것처럼 깔고 시작한다.


국가는 왜 항상 해결사인가

시장 실패 얘기는 많이 나온다. 독점, 외부효과, 불완전 정보 이런 문제들이 있다는 건 맞다. 그런데 Hunt는 거기서 "그러니까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면서, 국가도 실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거의 다루지 않는다.

정부도 사람이 운영한다. 재선을 원하는 정치인, 예산을 키우려는 관료, 로비를 하는 이익집단. 규제 기관이 오히려 규제 대상 산업의 이익을 대변하게 되는 경우는 이론이 아니라 현실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시장이 실패하니까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논리가 맞으려면, 국가가 시장보다 이 문제를 더 잘 처리할 수 있다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Hunt는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시장의 실패가 곧 국가 개입의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역사의 반쪽

자본주의의 문제는 꼼꼼하게 짚는데, 반대 방향은 어떤가.

산업혁명 이후 시장경제가 확산되면서 인류의 생활 수준은 그 이전 수천 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올라갔다. 절대 빈곤 인구가 줄었고, 기대 수명이 늘었고, 문해율이 올라갔다. 이게 전부 착취와 위기의 결과라고 설명하는 건 좀 어렵다.

반면 시장을 없애고 중앙에서 계획으로 운영하려 했던 시도들(소련의 집단농장, 대약진운동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이 책이 굉장히 얕게 지나간다. 그 실험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를 생각하면, 자본주의 폐해는 저렇게 많은 페이지를 쓰면서 대안의 실패는 이렇게 조용히 넘어가는 건 균형이 안 맞는다.


결국 분석인가 설득인가

읽으면서 자꾸 헷갈렸던 게 있다. 지금 이 사람이 경제사상을 분석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나를 특정 방향으로 설득하려는 건지.

경제학에는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다루는 실증적 명제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를 다루는 규범적 판단이 있다. 착취가 나쁘다, 불평등이 정의롭지 않다. 이건 경제학의 분석이 아니라 가치 판단이다.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으면 독자는 자신이 지금 분석을 읽고 있는지 설교를 듣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Hunt의 글은 분석의 언어를 쓰지만, 사실은 규범적 주장이 상당히 많이 섞여 있다. 나쁜 글이라는 게 아니라, 독자한테 그 구분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게 불편했다.


그래서 읽을 만한가

읽어봤으면 좋겠다. 근데 이게 경제사상사의 '표준 지도'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곤란하다.

각 이론이 어떤 시대에, 어떤 문제의식에서 나왔는지를 연결해서 보여주는 방식은 진짜 좋다. 그리고 경제학의 전제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한 번 의심해보라는 자극은 유익하다. 다만 Hunt가 그 의심을 처리하는 방식 자체에도 똑같은 의심을 적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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